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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영철 살인사건6

띤가띤가 2012. 11. 24. 10:00
















유영철의 선천적인 뇌기능 장애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유영철 본인은 아버지와 두 형, 자신, 여동생 모두 간질을 앓았으며 아버지와 작은 형은 간질로 죽었기 때문에 자신은 늘 간질 발작에 대한 두려움과 간질병으로 죽을 거라는 두려움을 안고 살아왔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유영철은 1993년부터 95년까지 국립서울정신병원에서 '측두엽 간질' 진단을 받고 외래 진료를 받은 기록이 있다.

정신의학계에서 간질은 인격 변화, 정신병, 폭력, 우울 정신 분열 증상을 초래하기도 한다고 알려져 있다. 아울러 '간질성 인격'이라고 해서 측두엽 간질 환자들은 철학이나 종교에 남달리 심취하거나 집착적이고 강박적인 사고, 거친 성격이나 폭력, 혹은 반사회적 성격 등을 갖기도 한다.

유영철에 대한 정신 감정 결과도 '반사회적 인격 장애'다. 하지만 가족과 친지들은 유영철의 아버지는 교통 사고로 사망했으며 작은 형은 간질과는 관계 없는 이유로 자살했다고 증언했다. 유영철 역시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필요한 경우 발작하는 것 말고는 간질 발작을 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특히 유영철의 범죄와 반사회적 성격은 간질과는 상관없이 환경의 영향과 본인의 선택에 의해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아울러 전국의 간질 환자들은 범죄와 상관없이 성실하고 모범적으로 생활하고 있다.

하지만 유영철 연쇄 살인 범죄의 심각성과 예외성 등을 감안할 때 사형이 집행되기 전에 반드시 정밀 진단을 통해 간질 여부와 간질이 인격 형성에 미치는 영향 등에 대한 과학적 연구를 수행 해 볼 필요가 있다.




유영철이 겪은 어린 시절의 충격적 경험은 정두영(동거녀와 행복하게 살겠다는 이유로 10억원을 모을 때까지 살해를 하겠다는 계획을 실행에 옮긴 2000년대 초기 연쇄살인범. 어린 시절 가난한 집안의 넷째 아들로 태어나 편모슬하에서 자라다가 경제적 어려움을 이유로 고아원에 맡겨지는 과정에서 정서적 충격을 경험함)이나 김해선(아버지에게 유년 시절 받은 학대로 인해 적절한 사회성을 획득하지 못하고 결국 어린 여학생 등을 무참히 살해한 2000년대 초반 살인범, 십자가 모양의 사체-김해선 사건 참조)과는 상당히 다른 유형이라고 할 수 있다. 즉 강력하고 폭발적으로 작용하는 표면적이고 가시적인 폭력과 학대의 소나기보다는 은근하고 장기적으로 축적되는 정서적 학대와 간접 폭력의 가랑비가 유년 시절을 보내는 동안 서서히 젖어들었다고 할 수 있다.

유영철의 아버지는 월남전 참전 군인으로 귀국 후 술과 도박, 여자에 빠져 가산을 탕진했고, 가정 폭력을 일삼는 사람이었다. 유영철이 일곱살 때 이혼한 아버지는 내연 관계에 있던 여성과 재혼해서 아이들을 데리고 무작정 서울로 올라와 여인숙을 전전하며 근근히 살았다. 그 과정에서 아버지와 계모에게 자주 맞는 등 폭력적인 상황에서 유년기를 보냈다.

초등학교 진학 후에는 친어머니가 서울로 올라와 이웃에 살며 세 아들을 데려다 기르기 시작했고, 이 때부터 유영철은 직접적인 학대에서 벗어나지만 애정결핍에 따른 욕구 불만으로 인해 주위의 관심을 끌어보려는 심리에서 말썽을 부리고 거짓말을 일삼았다.



초등학교 고학년과 중학교를 별 문제 없이 지낸 유영철은 그림 그리기를 좋아해서 화가가 되고 싶었다. 하지만 색맹에다 성적도 좋지 않아 예술 고등학교 진학에도 실패하고 정규 고등학교 진학에도 실패하여 학력이 인정되지 않는 직업 학교에 진학했다. 본인 진술로는 이러한 좌절이 범죄에 이르는 동기로 작용했다고 주장하지만, 당시 유행하던 그룹 사운드 밴드를 조직해서 활동하고 문학에 심취하는 등 학교 생활은 만족스러운 면도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행동을 통제해주고 바람직한 역할 모델을 제시해주는 모범적인 어른이 주위에 없었다는 것이 청소년기에 습득해야 할 덕성과 태도 형성에 장애로 작용한 듯 하다. 게다가 과시욕, 소유욕, 물욕이 강했지만 가난한 집안 형편 때문에 갖고 싶은 것을 다 갖지 못하자, 고등학교 2학년 때인 1988년 6월 어느날 밤에 남의 집에 몰래 들어가 금품을 훔치다 들켜 소년원에 들어갔다.

이후 주로 절도와 사기, 공무원 사칭 등의 범죄로 11번이나 형사 처벌을 받고 교도소를 들락날락하는 신세가 되었는데, 유영철의 연쇄 살인 수법을 자세히 살펴보면 청소년기 첫 범죄 수법에 이후 교도소에서 배운 수법들이 첨가되었음을 알 수 있다.




유영철은 가정에서나 학교에서나 다른 사람의 생각과 입장, 감정에 대한 이해와 대화 방법 등 더불어 살아가는 데 필요한 '사회적 기술'을 제대로 배우지 못했다. 그러다보니 결혼 생활 내내 아내와 심각한 갈등을 겪어야 했다. 또한 아들에게 자랑스럽고 떳떳한 아버지가 되고 싶은 마음은 강하나 기술이나 능력이 없어 변변한 직장을 구하지 못하는 상황, 그리고 늘 범죄를 저지르며 경찰에 쫓기고 죽기보다 싫은 교도소에 가야할 지도 모르는 불안감 등이 내내 스트레스를 유발했을 것으로 보인다.




유영철이 연쇄 살인을 결심한 직접적인 계기는 아내의 일방적인 이혼 심판 청구와 이를 받아들인 법원의 이혼 결정이었다. 교도소에서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며 오직 가정으로 돌아갈 희망에만 의지하던 유영철에게 이혼 통고서는 큰 충격이었을 것이다.

유영철은 자신의 지능지수가 140이 넘는다는 거짓 주장을 하고(실제 유영철의 지능지수는 95~115 사이의 '보통'에 해당하는 것으로 밝혀짐) 철학자 쇼펜하우어나 혁명가 체 게바라의 영향을 받았다고 내세우는 등 과시적이고 자기애가 강했다. 하지만 '도둑질-체포-교도고 수감의 악순환'이라는 비참하고 괴로운 밑바닥 인생을 전전하게 되자, 그 모든 것이 가난과 잘못된 사회탓이라는 비뚤어진 반사회적 사고를 키워왔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게 세상에 쌓이고 눌린 감정들을 폭발할 대상이나 명분을 찾지 못하던 차에 이혼통고서는 '지금' 그 감정을 폭발시켜야 할 계기를 마련해준 것으로 판단된다. 특히 더 이상 자신이 바라는 성공이나 행복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서른세 살의 죄수 유영철에게 그나마 남아 있던 마지막 희망이요, 자신과 관련해서 유일하게 긍정적인 존재인 아들과의 단절을 통보 받았다는 사실은 '세상의 끝'을 만난 기분이었을 것이다.

세상을 비관해 삶을 끝내기로 작정한 김대한(당시 56세)이 혼자 죽지 않고 붐비는 대구 지하철로 가서 인화성 물질을 뿌리고 불을 질러 수백 명을 살상했듯이, 유영철은 끝장난 자기 삶에 대한 복수를 불특정 다수의 살인 행각으로 연결시켰다고 볼 수 있다.




유영철의 뇌기능 문제와 불우한 성장 과정, 가정 파탄 등은 연쇄 살인에 대한 변명과 합리화의 명분은 될 수 있지만 이유는 될 수 없다. 감정의 격화나 충동에 의한 살인이 아니라 철저하게 계획되고 치밀하게 은폐된 범행이기에 더욱 그렇다.

유영철은 다른 어떤 범죄자나 연쇄 살인범보다 정상적인 삶을 살 수 있는 여지와 가능성이 많았다. 아버지의 무절제한 생활과 빈곤, 계모의 학대 등은 친어머니의 노력으로 곧 회복되었고 본인만 노력했더라면 진학이나 취업에 남다른 어려움을 겪을 요인이 거의 없었다. 본인은 색맹으로 인한 예술 고등학교 진학의 실패가 큰 좌절이었다고 진술하지만 청소년기의 그러한 실패는 '진로 변경'의 계기가 될지 몰라도 '인생 포기'의 이유가 될 수는 없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야간 주거 침입 절도'라는 중범죄를 저지르다 체포되었으면서도 이를 반성하고 성실하게 사는 계기로 삼으려 노력하기보다 신고한 피해자와 자신을 구해주지 않은 종교에 대한 반감과 복수심을 드러내는 태도에서도 유영철 본인의 의지와 선택으로 범죄자의 길에 들어섰음을 확인할 수 있다.

유영철은 경찰 수사에서 법정 진술에 이르기까지 일관되게 "고등학교 2학년 때까지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으나 사소한 실수를 용서하지 않고 소년원에 보낸다는 판결을 내리는 순간, 손안에 들고 있던 나무 십자가를 부러뜨렸고 신을 버렸다"라고 주장했다. 주택가 부유층 노인을 연쇄 살인의 대상으로 선정한 것도 본인의 주장과는 달리 고등학교 2학년 때의 첫 절도 실패 경험을 만회하고, 당시 자신을 신고한 '어른들'에게 복수하겠다는 심리도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유영철 사건은 20명이라는 충격적인 희생자와 상상조차 하기 힘든 잔혹한 범행 수법만큼이나 많은 아쉬움을 남겼다.

먼저 유영철이 첫 범행을 저지른 고등학교 2학년 때, 소년원에 보내기에 앞서 심리 검사와 전문적인 상담을 통해 성격 이상과 품행 장애를 치료하고 교정하는 관심과 배려가 있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다. 지금도 우리 사회는 소년 범죄자들에 대한 대책이 충분하게 마련되어 있지 않아 성인 범죄자처럼 교도소에 보내거나 소년원에 보내지 않으면 기소 유예, 선고 유예 등의 처분으로 다시 가정으로 돌려보낸다. 유영철 사건 피해자들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소년 범죄자 선도에 더 많은 사회적 관심과 제도 개선의 노력이 필요하다.

다음은 유흥업 종사 여성 등 위험에 노출되어 있고 자기 보호에 취약한 사회적 약자에 대한 관심이다. 합법적인 일에 종사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경찰 등 국가 기관이나 사회 각 분야에서 이들을 무시하고 경시하면 유영철 같은 파렴치한 갈취범이나 변태적 폭력배들이 마음껏 이들을 유린한다.

셋째는 경찰의 피해자 대책이다. 피해자들이 보호받지 못하고 필요한 지원과 배려를 받지 못하는 상황에 처해 있다 보니 유족 중 한 명은 자살을 하고 한 명은 유영철에게 우산을 들고 덤벼들었다가 경찰관의 발길질에 맞는 사건까지 발생한 것이다. 이번 사건은 피해자는 경찰 수사의 수단이 아니라 목적이라는 점을 분명히 인식하는 확실한 계기가 되어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경찰 수사 체계의 문제점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유사한 범죄가 잇따르면 각 사건별로 수사 본부를 설치하고 개별적으로 수사할 것이 아니라 지방경찰청이나 경찰청에서 통합 관리하는 체계를 구축하는 것이 절실하게 필요하다. 부유층 노인 연쇄 살인 사건 두 달 뒤인 2004년 1월 유영철이 서울에서 절도 혐의로 붙잡혔지만 전혀 관련성을 점검하지 못한 것인 해당 경찰서 수사진의 문제라기보다는 수사 시스템의 문제라고 봐야 한다.

유영철은 우리에게 충격과 공포를 안겨주었지만 우리는 그 충격과 공포를 딛고 더 안전하고 더 살기 좋은 사회를 만들어 결코 유영철 같은 인간이 자신을 합리화하거나 제 2, 제 3의 유영철이 나타날 여지를 남기지 말아야 한다. 유산을 사회에 헌납하고 유영철을 용서하는 글을 재판부에 전달한 피해 유가족들의 위대한 용기와 자비가 유영철에게는 사형보다 더 큰 형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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