띤가띤가 2012. 12. 2. 10:30

 












사전 합숙 훈련과 노동을 통한 자금 모으기, 살인 예행 연습, 아지트 구축, 배신자 처단을 통한 조직 결속력 강화, 납치한 여성의 노예화, 연쇄 살인과 납치 강도 등 계획대로 모든 일이 이루어지자 지존파 조직원들은 어린이 강간치상죄로 교도소에 들어가 있는 '지존' 김기환의 지도력과 자신들의 능력에 감탄하면서 더욱 대담한 범행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첫번째 준비는 '무기 구입'이었다. 서울 청계천과 부산 무기 밀매상 등을 통해 다이너마이트, 공기총, 가스총, 군용 대검, 전자봉, 전기충격기, 무전기 등을 구입했고, 자동 소총과 실탄 등 '진짜 총' 구입을 의뢰해두었다.

두번째 준비는 공격 대상인 '진짜 부유층 명단' 확보였는데, 지존파 일당은 언론을 통해 부유층 고객이 많인 고급 백화점으로 잘 알려진 H 백화점의 주요 고객 명단을 입수했다. 영문을 모르는 고향 선후배에게 돈을 주고 백화점 직원을 소개받은 뒤 수백만원을 주고 빼낸 정보였다.

세번째 준비는 '조직원 보강'이었다. 식사 준비와 잡일 등을 시킬 여성 조직원이 필요하다고 판단하여 영광읍 J 주점 종업원인 절도 전과 1범의 이경숙을 지목했다. 소사장 부부를 살해한 뒤인 9월 17일, 이경숙과 평소 친분이 있던 강동은이 주점을 찾아가 이경숙이 진 빚 1,600만원을 대신 갚아주고 이경숙을 데려왔다.

이들은 또한 중국 등 '해외 전지 훈련'을 통해 결속력을 다지고 시야를 넓혀 범죄 수법을 향상시키겠다는 계획도 세웠으나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다.






9월 15일 아침, 영화에서 본 대로 다이너마이트 설치, 투척, 폭파 등을 위한 모의 훈련을 하던 일당은 예기치 않은 사고를 당했다. 폭발물을 다를 줄 몰라 퇴관을 잘못 건드린 김현양이 손에 심한 화상을 입은 것이었다. 의심을 받지 않기 위해 인질인 예나 씨와 둘이서만 영광 읍내 병원에 간 김현양은 예나 씨에게 현금 50만원과 휴대전화를 건네주면서 가족처럼 행동하고 치료비를 지불하라고 지시하고는 진료실로 들어갔다.

진료실 밖에 혼자 남은 예나 씨는 가슴이 콩닥콩닥 뛰면서 맥박이 빨라졌다. 그 길고 참담한 감금 상태에서 처음으로 벗어났지만 언제 어디서 이들이 자신을 감시하고 있을지 몰라 두려움과 공포심에 감히 발을 떼기가 두려웠다. 용기를 내어 주변을 둘러보니 악귀같은 지존파 일당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낯선 사람들 중 누가 그들의 가족이나 친지일지 몰라 섣불리 도움을 청할 수도 없었다.

예나 씨는 마치 화장실에 가듯 최대한 태연한 표정을 지으며 빠른 걸음으로 복도를 지나 현관으로 향했다. 주위의 모든 사람들이 자신을 보는 것 같고 누군가 자신을 부르는 느낌이 들어 등줄기에서 땀이 흐르고 눈앞이 흐릿해지면서 온 몸에 힘이 하나도 없이 다 빠져나가는 듯 했다. 죽을 힘을 다해 걸음을 옮기며 병원문을 열고 나서자 택시가 서 있었고 예나 씨는 얼른 택시에 올라탔다.

"아저씨, 빨리 출발해주세요!"

행선지가 어디냐는 물음에도 '무조건 빨리' 만을 외친 예나 씨는 택시 기사도 믿지 못해 병원을 벗어나 한적한 농촌 마을에 들어서자 택시비를 지불하고 차에서 내렸다. 근처에 보이는 '포도 농원'으로 들어간 예나 씨는 인상 좋고 친절해보이는 주인 아주머니에게 "급히 큰 도시로 가야해서 그러는데, 돈은 섭섭지 않게 줄테니 믿을 만한 운전 기사를 불러달라"고 부탁했다. 주인 아주머니가 불러 준 '무허가 택시'를 타고 전남 광주로 간 예나 씨는 다시 광주에서 택시를 대절해 서울로 올라온 뒤 역삼동의 한 모텔에 투숙해 몸을 숨겼다.

병원에서 탈출한 뒤로 10여시간이 불안과 공포심에 떨며 도망다닌 예나 씨에게는 마치 몇년의 세월 같았다. 모텔에 앉아 생각을 정리하려던 예나 씨는 너무 충격적인 경험을 한 뒤라 도저히 상황 파악이 안 되고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판단할 수도 없었다. 가까스로 생각해낸 것이 가장 믿을만하고 세상물정을 잘 아는 김정춘(가명, 31세, 남)씨의 전화번호였다. 자정이 가까운 시간이었지만 김정춘 씨는 모텔로 와주었고, 대강의 이야기를 들은 후 경찰서로 가자고 예나 씨를 설득했다. 

9월 16일 새벽 2시, 김정춘 씨와 이예나 씨는 서초 경찰서 형사계를 찾았다. 








처음 예나 씨의 이야기를 들은 서초경찰서 강력반 형사는 도저히 그 내용을 믿을 수 없었다. 겉으로 표현은 못했지만 혹시 정신 이상이 아닌지 의심했으며 영화나 소설 속 이야기를 하며 장난하는 건 아닌가 싶은 생각마저 들었다. 그러나 예나 씨와 함께 납치된 이건중 씨가 전북 장수에서 교통사고로 사망했다는 것과 중소기업체 사장 부부가 납치되었다는 신고가 있었던 것이 사실로 확인되자 서초경찰서 강력반은 초긴장 상태에 돌입하여 예나 씨의 진술을 토대로 수사 계획을 수립했다.

예나 씨의 진술대로라면 지금쯤 일당은 도주한 예나 씨가 경찰을 이끌고 검거하러 올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은신처를 옮길지도 모르는 급박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다이너마이트 등 중 화력을 갖춘 일당에게 섣불리 접근할 경우 큰 화를 부를 수도 있어 신중하고 치밀한 '작전'이 필요했다.

수사진은 일단 전남 영광에 있는 범인들의 아지트 주변에 잠복해 상황을 살피면서 범인들이 외출하는 틈을 노리기로 했다. 예나 씨의 희미한 기억을 따라 영광시 일대를 뒤지던 형사대는 범인들이 신축한 외딴 건물을 발견했고, 곧 잠복 수사에 들어갔다.

9월 19일 아침 7시 반, 트럭 한 대가 범인들의 아지트에서 나와 마을 쪽으로 향했다. 형사대는 뒤따라나오는 차량이 있는지 살피며 트럭을 미행했고, 1.5킬로미터 지난 시점에서 트럭을 세운 후 격렬한 격투 끝에 운전자를 체포했다. 체포된 자는 특수 절도 등 전과 2범의 강동은(21세), 지존파 조직의 행동대원으로 가장 과격하고 잔인했다.






격렬히 저항하는 강동은을 수색하고 추궁한 결과 현금 200만원을 가지고 장을 보러 나왔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또한 차량 매매 계약서가 발견되었는데, 그 매매 계약서에는 지존파 아지트의 주소와 전화번호가 적혀 있었다. 범행에 쓸 새 차를 구매하려고 한 것이었다.

충분한 사전 논의와 예행 연습을 한 뒤 경험이 많은 베테랑 형사가 전화를 걸었다.

"거기 강동은 씨 집 맞지요? 강동은 씨가 교통 사고를 당해서 병원 응급실로 실려갔습니다. 그런데 강동은 씨가 현금 200만원과 중요한 서류 같은 걸 가지고 있기에 지서에 맡겨두었으니 찾아가세요"

"이 전화번호를 어떻게 알았습니까?"

수회기 너머의 범인이 경계심을 나타내자 형사는 매매 계약서에 있는 번호를 보고 전화했다고 태연하게 대답해 경계심을 무너뜨렸다.

오전 9시, 승용차 한 대가 도착했고, 한 남자가 차에서 내려 지서로 들어왔다. 강동은이라는 이름을 입밖에 내자마자 남자는 형사의 업어치기에 바닥으로 꼬꾸라지고 양손에 수갑이 채워져 완전히 제압당했다. 붙잡힌 남자는 특수 절도 등 전과 3범인 문상록(23세)이었다.

한참이 지나도 문상록이 나오지 않자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 나머지 범인들은 차를 몰아 도주하기 시작했다. 20여 킬로미터에 걸친 숨막히는 추격전이 벌어졌고, 범인들의 차량은 길가 담배력을 들이받는 사고를 낸 후에야 멈춰섰다. 차가 멈추자 형사들이 달려 들었고 격렬한 격투 끝에 운전자를 체포했는데, 차안에는 여자도 한 명 있었다. 체포된 범인들은 상해 전과 1범인 김현양(22세)과 이틀 전에 지존파에 합류한 절도 전과 1범의 이경숙(여, 23세)이었다.






체포한 강동은을 이용해 조직원 일부를 아지트 밖으로 유인해낸 경찰은 이제 아지트에 웅크리고 있는 잔당을 소탕해야 했다. 두 쪽으로 나뉜 범인들은 동시에 공격하지 않으면 서로 연락을 취해 도주하거나 폭파 등 큰 피해를 유발할 수 있기 때문에 매우 치밀하면서도 효과적인 작전이 필요했다. 예나 씨의 기억과 검거된 강동은의 진술에 의하면 범인은 5명으로, 승용차를 타고 지서로 온 범인이 2~3명임을 감안하면 아지트에는 2~3명이 있었다. 하지만 아지트에는 폭발물과 총기류 등 무기가 가득했기 때문에 섣불리 공격할 수가 없었다.

서초경찰서 형사대는 관할 영광경찰서에 협조를 요청했고 영광경찰서는 형사 20명을 현장에 보내주었다. 지서에서 잠복중이던 형사대에서 1명을 검거하고 달아난 승용차를 추적하기 시작했다는 무전 연락을 받자마자 20여명의 형사대는 아지트를 급습했다. 범인들의 총격이나 폭탄 공격이 시작되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위험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형사들은 범인들의 저항의지를 조기에 꺾기 위해 동시에 공포탄을 쏘고 소리를 지르며 진입했다.

하지만 범인들은 형사들의 습격을 전혀 예상치 못한 터라 무방비 상태였다. 조직원 중 막내인 강문섭(20세)은 방에 앉아 있다가 저항도 못한 채 체포되었고, 같은 나이지만 특수 강도 등 전과 2범인 백병옥은 범죄자 특유의 직감 때문인지 형사들의 진입과 동시에 뒷문 유리창을 깨고 달아났다. 백병옥에 대한 대대적인 추적과 수색이 시작되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경찰은 대나무 밭에 웅크리고 숨어 있던 백병옥을 검거했다.

경찰의 수색 결과 범인들의 아지트에서는 각종 무기류와 총기류, 폭발물 등 범행도구 18종 70점이 발견되었고, 현금 3,500만원과 서울 고급 백화점의 고객 명단을 비롯한 추가 범행 준비 문건 등 증거물이 다량 발견되었다.






검거된 일당들을 상대로 조사한 결과, 지존파 일당의 범행에는 정보 제공이나 알선 등을 한 공범들이 있었다. 물론 자신들이 제공한 정보나 도움들이 어떤 일에 쓰이는지 전혀 알지 못한 채 이루어진 일들이었지만 돈을 받고 자신이 일하는 백화점의 고객 명단을 빼내거나, 불법 무기류 등을 판매하거나 알선하는 등 그 하나하나가 범죄 행위였다. 이렇게 지존파의 범행에 직간접적인 도움을 준 공범으로 7명이 추가로 검거되었다. 특히 백화점 고객 명단에는 모두 1,200명의 이름과 주소, 전화번호가 고액 거래자 순으로 기록되어 있어 커다란 사회적 파장을 불러 일으켰다.

지존파 일당들이 구입해서 보유하고 있었던 무기류와 백화점 고객 명단, 그리고 "더 못 죽인 것이 한이다"라고 외치는 모습 등을 종합해볼 때 이예나 씨의 용감한 탈출과 그에 따른 경찰의 기민한 대응이 없었다면 우리 사회를 더욱 큰 충격과 혼란에 빠뜨릴 추가 범행이 자행되었을 것은 자명하다. 작은 범법 행위 하나가 얼마나 커다란 피해로 연결될 수 있는지를 극명하게 드러낸 사건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번 지존파 수사 과정에서 드러난 사실 중 가장 가슴 아픈 것인 소사장 부부의 안타까운 사연이다. 어린 두 딸을 둔 부부는 누구보다 단란하고 화목한 가정을 꾸리고 있었으며, 작은 중소기업체를 운영했지만 부도 직전의 기업을 인수해 전 재산을 털어넣고 회생시키려 애쓰는 중이었기에 결코 지존파 스스로 정한 범행 대상인 '가진 자'라고 보기 어려운 형편이었다. 특히 납치된 후 소사장이 범인들에게 전한 편지가 발견되어 주위를 더욱 안타깝게 했는데 그 내용 중 일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 회사를 작년에 인수해서 흑자 경영을 해보려고 막 기계 설비를 들여놓는 중입니다. 회사 사정이 많이 좋지 않은 상황입니다... 지금 형편상 마련할 수 있는 돈은 4,300만원 뿐입니다. 제 통장을 확인해보시면 알 겁니다. 어렵게 마련한 회사인만큼 꼭 살려서 어엿한 기업을 만들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원하는대로 다 하고 있는 돈도 다 드리겠습니다. 돈은 벌면 되니까 아까워하지 않겠습니다. 경찰에도 알리지 않겠으니 제발 제 아내와 딸들을 해치지 않는다고 약속해 주십시오... 돈을 마련해 나오라고 하고 사전에 저와 약속해서 가까운 곳에서 제 아내를 인질로 잡고 있다가 돈을 전달받으면 후에 놓아주십시오. 부탁드립니다. 이상의 말씀은 남아의 약속으로 꼭 지키겠습니다. 나도 어렵게 살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나도 남의 돈을 훔쳐 본 경험이 있으니까요.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 또 한 회사를 운영하는 사장으로서 돈 아까워하지 않고 다시 열심히 벌면되니까 허튼 짓 안하겠습니다"








지존파 일당 7명은 모두 가난한 농촌 출신으로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고 학교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했다. 강문섭을 제외하고는 모두 범죄 전과가 있으며 자신들이 실패하고 낙오된 삶을 사는 이유가 환경과 사회 탓이라고 생각하는 등 반사회적 경향이 강했다. 특히 풍족하고 부유한 삶을 동경하면서도 자신들은 그렇게 될 수 없다는 현실에 맞닥뜨리자 가진 자들을 혐오하기 시작했는데, 이러한 인식에는 당시의 사회 분위기와 몇 해 전에 발생한 탈주범 지강헌 사건에서의 '유전무죄 무전유죄' 논란이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분석된다.

두목으로 군림하며 범행을 총지휘하고 부추긴 김기환을 포함해 조직원 대부분이 같은 마을 출신 선후배나 친구 사이로 구성되어 결속력이 높았고, 20대 초반의 젊은 나이였던 것도 끔찍한 살인극으로 이어진 원인으로 볼 수 있다. 혼자라면 실행할 수 없는 잔혹하고 대담한 일을 비슷한 처지에 있는 여럿이 함께 함으로써 '책임의 분산' 효과가 발생했으며, 서로 '남자다움'을 입증하기 위해 대담성을 과시하느라 폭력성이 증폭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조직원들은 정신 이상 증세를 보이지도 않았고, 신체나 행동의 장애도 전혀 없었으며, 특별히 어린 시절에 학대 당하는 등 충격적인 경험도 없었다. 이런 점들을 고려하면 이번 지존파 연쇄 살인범들의 범행은 학교와 사회 생활을 통해 형성된 소외와 열등감, 무력감, 욕구 불만과 일탈적이고 범죄적인 또래 집단 및 목적 달성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겠다는 이기적인 사고, 자신이 모르는 사람은 단지 '대상'이나 '수단'으로 여기는 인명 경시적 태도가 가장 큰 원인이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이들이 주로 접한 홍콩 무술 영화나 폭력적이고 선정적인 3류 소설 등 대중매체 역시 이들처럼 비뚤어진 심성을 가진 이들에겐 총보다 무서운 '무기'가 될 수 있다는 우려가 현실로 나타났다는 것도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무엇보다도 신속하고 기민한 대응과 치밀한 전략으로 일당을 일망타진한 서초경찰서의 사례와, 의문의 여지가 많은 교통 사고와 실종 신고, 납치 신고에 허술하게 대처함으로써 사건 조기 해결의 기회를 놓친 충남, 전남, 울산, 광주 해당 경찰서의 사례는 상호 비교 검토되어 경찰 수사력 및 범죄와 사건 사고 대응 능력 향상으로 이어져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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