띤가띤가 2012. 11. 21. 00:13

구체적인 살인 현장이나 수법 묘사가 포함된 글이므로 읽는 데 주의해주시기 바랍니다 

























2004년 9월 24일 수요일, 이영애(가명, 여, 30세) 씨는 아침 일찍부터 생신을 맞은 서울 시아버님께 축하 인사차 전화를 드렸으나 아무도 받지 않았다. 의사인 남편과 지방에서 지내느라 직접 찾아뵙지 못하는 것도 죄송스러운데 전화 통화마저 안 되자 마음이 편치 않았다. 일흔이 넘었지만 젊은이 못지 않게 건강하셨고 평생 대학 교수로 재직하면서 몸 관리를 해오신 터라 그저 전화선에 문제가 생겼겠거니 하고 기다릴 수도 있었지만, 어디 가신다는 말씀도 없었는데 생신날 연락이 안 된다는 것이 몹시 마음에 걸렸다. 영애 씨는 남편에게 빨리 퇴근해서 올라가보자고 채근하고 서둘로 서울 갈 준비를 했다.


밤 10시가 되어서야 강남구 신사동 주택가 부모님댁에 도착한 영애 씨 부부는 초인종을 눌러도 응답이 없자 가지고 있던 열쇠로 문을 열고 들어갔다. 인기척이 없는 집 안 공기는 싸늘했고 불까지 꺼져서 어두컴컴했다.

“아버님! 어머님!”

시부모님을 부르며 안방 문을 여는데 비릿한 냄새가 코를 찔렀고, 불을 켜보니 차마 볼 수 없는 처참한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으악!”

영애 씨는 외마디 소리를 지르고 그대로 주저앉았다.

“왜그래?”

뒤따라 들어온 남편 역시 넋을 잃었다.
노부부는 머리가 깨어진 채 잠옷 바람으로 엎어져 있었고 이불과 방바닥은 온통 피로 물들어 있었다. 112 신고를 받고 출동한 강남경찰서 형사들은 출입문이 잠겨 있고 외부에서 침입한 흔적이 없으며 뒤진 흔적은 있으나 거액의 현금과 귀금속들이 그대로 있는 걸 보고 면식범에 의한 원한 관계나 가족 갈등에 의한 살인으로 보고 피해자 주변을 중심으로 수사에 착수했다.



나무와 담에 가려 밖에서는 안이 보이지 않는 신사동 피해 주택


서울경찰청 과학 수사 요원들의 현장 감식과 국립과학수사연구소의 부검 결과 시아버지 이진수(가명, 서울 모 대학 명예교수, 73세) 씨는 머리에 둔기로 5차례 공격을 받고 두개골 골절 및 뇌손상을 심하게 입은 것이 사인이었고, 목과 팔에도 칼에 찔린 상처와 골절상이 발견되어 방어와 저항을 한 흔적이 역력했다. 시어머니 이숙진(가명, 67세) 씨는 같은 둔기로 머리에만 3번의 공격을 받았는데 정수리 부근에 집중되었고 다른 부위에는 공격받은 흔적이 없는 것으로 보아 전혀 저항하지 못한 상태에서 일방적인 공격을 받고 사망한 것으로 판단되었다.

둔기는 망치보다는 훨씬 컸고 각이 있다는 것은 알 수 있었으나 어떤 물건인지는 밝혀내지 못했다. 사망 시간은 오전 10시에서 정오 사이로 추정되었다. 희미한 구두 뒷굽 자국과 지문, 모발 몇 점 등 증거도 일부 수거되었다.

그러나 이 사건 뒤에 온 나라를 뒤흔들 엄청난 미스터리가 숨겨져 있을 줄은 누구도 눈치채지 못했다.







신사동 명예 교수 피살 사건이 발생한 지 꼭 보름 만인 10월 9일 목요일이었다. 은퇴 후 소일거리 삼아 주차관리원으로 일하는 고상수(가명, 61세) 씨는 오늘도 새벽 5시에 출근해서 하루종일 근무하느라 지친 몸을 이끌고 북한산 자락에 있는 집으로 왔다. 저녁 6시 반이었다. 맛있는 저녁과 푸근한 휴식을 기대하며 초인종을 눌렀지만 아무 대답이 없었다. 누르고, 또 누르고 아내를 소리쳐 불러도 마찬가지였다. 집에 전화해도 신호만 갈 뿐이었다. 여든이 넘은 노모와 장애인 아들을 돌보느라 집을 비우는 일이 없는 아내가 웬일인가 싶었다.

급한대로 담을 넘어 들어가 거실의 스탠드 불을 켜니 아내(58세)가 벽난로 옆에 피를 흘리고 쓰러져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여보!”

달려가 보았지만 이미 싸늘해진 시신이었다. 놀라고 당황해서 어쩔 줄을 모르는 데다 윙윙거리는 머릿속은 정리가 안 돼 잠시 멍하니 있다가 무의식적으로 전화기를 들고 112를 눌렀다. 무슨 말을 했는지도 모른 채 전화를 끊고는 어머니와 아들이 생각나 목이 터져라 외쳐 부르며 온 집 안을 헤매다녔다. 아들(34세, 지체 장애)은 2층 방문 앞에, 노모(82세)는 현관 앞 화장실 입구에 숨져 있었다. 머리가 깨져서 온 바닥이 핏물로 흥건했다.



구기동 피해 주택을 마당에서 본 모습


현장에 출동한 서대문 경찰서 형사들은 출입문이 잠겨 있었고 외부에서 침입한 흔적이 없으며 뒤진 흔적은 있으나 거액의 현금, 수표와 귀금속 등이 그대로 있는 점 등으로 보아 면식범에 의한 원한 관계나 가족 갈등에 의한 살인으로 보고 피해자 주변을 중심으로 수사에 착수했다.

서울경찰청 과학 수사 요원들의 현장 감식과 국립과학수사연구소의 부검 결과 피해자들은 둔기로 얼굴과 머리에 여러 차례 가격을 당했으며 두개골 골절과 뇌손상 때문에 사망한 것으로 밝혀졌다. 현장에서는 뚜렷한 발자국이 채취되어 곧바로 신발 종류와 제조 회사를 확인하기 위한 데이터베이스 검색 작업에 들어갔다. 언론에서는 신사동 사건과 한 데 묶어 ‘부유층 노인 연쇄살인’이라 부르기 시작했고 경찰에서는 서로 다른 개별 사건이라는 점을 강조하면서 불필요한 공포가 확산되지 않도록 경계했다.

강남경찰서와 서대문 경찰서에 각기 차려진 수사 본부에서도 서로 다른 사건으로 보고 피해자 주변과 인근 지역 불량배, 강절도 전과자와 정신질환자를 대상으로 탐문 수사를 전개해나갔다. 그러나 두 사건을 비교 분석한 서울경찰청 범죄분석반은 범행 시간과 수법, 흉기, 피해자의 나이, 피해 주택의 위치와 구조 등 동일한 부분이 많은 것을 지적하며 조심스럽게 동일범에 의한 연쇄 범죄의 가능성을 제시했다.






구기동 사건이 발생한지 꼭  일주일 만인 10월 16일 목요일, 지병 치료를 위해 장인을 모시고 병원에 갔던 최용준(가명, 36세, 회사원) 씨는 오후 1시경 삼성동 처갓집에 돌아와 초인종을 눌렀다. 그런데 아무리 눌러도 응답이 없었고 소리쳐 불러도 대답이 없었으며 전화도 받지 않았다. 마침 장인도 열쇠를 가지고 있지 않았으므로 처남에게 전화를 하고 기다려야 했다. 마침내 처남이 와서 문을 열고 들어가니 비릿한 냄새가 훅 끼쳤다. 장모 유지혜(가명, 69세) 여사가 화장실 바닥에 엎어져 피를 잔뜩 흘리며 의식을 잃은 채 신음하고 있었다. 역시 둔기에 의한 두부(머리 부위) 및 안면부 다발성(여러 군데) 손상이 원인이었다. 밤 1시 45분 경 유여사는 아무 말도 남기지 않은 채 숨을 거두었다.

한 편 112 신고를 접하고 현장에 출동한 강남경찰서 형사들은 앞선 두 사건을 의식해 더욱 신중히 현장 관찰을 시도했다. 역시나 출입문이 잠겨 있었고 외부 침입 흔적이 뚜렷하지 않았으며 뒤진 흔적은 있으나 현금과 귀금속은 없어지지 않고 그대로 있었지만 집 뒤쪽 담장 안과 밖에서 다량의 발자국을 발견했다. 면식범이나 가족이 아닌 외부인의 침입이 있었던 흔적이 처음으로 발견된 것이다.




나무가 울창한 삼성동 피해 주택 마당


뒤에 도착한 서울경찰청 과학수사반의 현장 감식 결과 같은 발자국이 안방과 거실, 화장실에서도 발견되었고 구기동 사건 족적과 비교해보니 일치했다. 동일범이 분명했다. 서울경찰청은 물론 경찰청 전체가 극도의 긴장 상태에 돌입했고, 사건과 수사 내용에 대한 철저한 보안 유지가 하달되었다. 언론 보도는 연쇄 살인임을 기정사실화하기 시작했고 경찰이 윤곽조차 잡지 못한 채 엉뚱하게 피해자 가족과 주변 인물들을 수사대상으로 삼아 괴롭힌다고 맹렬히 비난하기 시작했다.

그런 가운데 한 일선 경찰관이 “한 건만 더 발생하면 잡을 수 있다”며 마치 또 다른 희생자가 발생하길 바라는 듯한 발언을 한 사실이 알려지며 작은 소동이 일기도 했다.






여론의 압박과 경찰의 검문 검색 및 수사망이 강화되면서 한동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물론 수사에 큰 진전도 없었다. 하지만 평화는 오래 가지 않았다. 삼성동 사건 이후 한  달이 지난 11월 18일 화요일, 역시 주택가에 담과 마당이 있는 혜화동 양옥집이었다.

약사인 오혜란(가명, 62세) 씨는 아침 9시 50분경 약국에 출근해서 한창 일을 보던 12시 50분 경에 보일러 기사의 전화를 받았다. 애프터서비스 의뢰를 받고 왔는데 아무리 초인종을 눌러도 대답이 없다는 항의성 전화였다. 간병인 겸 파출소 아주머니가 거동이 불편한 팔순의 시아버지 혼자 놔두고 낮잠을 자거나 손자를 업고 동네에 산책 나간 모양이었다. 착하고 성실해서 늘 식구처럼 지냈던 아주머니가 그럴 리 없어 이상하게 생각하면서도 일이 바빠서 그러려니 했다.

“미안해요, 식구들이 깜빡 잊고 외출했나 봐요. 좀 이따 들어가서 다시 연락드릴게요”

한창 바쁜 시간을 넘긴 오후 3시경 집에 들른 오여사는 여전히 초인종에 응답하지 않는 아주머니에게 화가 나 열쇠로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러나 이게 웬 일인가? 집 안에는 온통 연기가 자욱해 앞이 보이지 않았다. 연기를 헤치고 시아버지의 방문을 여니 바닥에 피만 흥건하고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갓난아기인 손주가 있는 작은 방문은 잠겨서 열리지도 않았는데, 하필 오여사는 방문 열쇠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이 방문을 열고 들어가니 침대 위에는 시아버지가, 방바닥에는 간병인 아주머니(53세)가 불에 탄 채 누워있는 것이 아닌가? 갓난아기는 이불과 포대기에 겹겹이 싸인 채 아무 상처도 없이 옆방 소파 위에 누워있었다. 일말의 양심이 남아서일까, 아니면 아기와 관련이 있는 범인일까?

현장을 관찰한 동대문 경찰서 형사들 중 일부는 사체에 불을 지르고 지하실에 있던 곡괭이와 골프채 등을 가져다 금고를 부수려 한 흔적 등이 신사동, 구기동, 삼성동 사건과 확연히 다르다는 점을 발견하고 이번 사건은 연쇄살인에 해당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현장을 감식한 서울경찰청 과학 수사 요원들과 사체를 부검한 국립과학수사연구소 법의관들은 둔기에 의한 두부 및 안면부 다발성 손상과 두개골 함몰 및 뇌손상 등 공격 방법과 흉기가 동일하다는 점에 주목했다. 거실과 복도 등에서 발견된 발자국 역시 신사동을 제외한 이전 두 사건과 일치했다. 사망 추정 시간도 오전 10~12시, 이전 세 사건과 같았다.

피해자 집 주변을 수색하던 경찰은 인근 건물 입구에 CCTV 카메라가 설치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고 녹화된 테이프를 제출받아 분석에 들어갔다. 다행히 테이프를 틀자마자 범행을 마치고 피해자의 집 옷장에 걸려 있던 점퍼를 걸쳐 입은 채 유유히 걸어내려가는 범인의 뒷모습이 찍힌 화면을 찾아낼 수 있었다. 앞모습이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가슴을 치고 땅을 쳤지만 범인의 얼굴을 확인할 길은 없었다. 다만 국립과학수사연구소 영상분석실에서 개발한 첨단 기법으로 범인의 키가 168센티미터라는 것을 알아낸 것은 큰 소득이었다.





경찰은 CCTV 화면에 찍힌 뒷모습과 168센티미터의 키, 2~30대 후반의 남자, 그리고 족적 검색에서 찾은 K제화 B캐주얼화를 신고 다니는 사람을 찾는다는 수배 전단을 전국에 배포했다.






동일범의 연쇄 범죄?
수사진은 우선 사건의 성격과 용의자의 윤곽, 그리고 범행 동기를 파악해야 했다. 가장 먼저 알아내야 할 것은 과연 네 사건 모두 동일범의 소행인지, 모방 범죄인지, 아니면 전혀 관련없는 개별 범죄인지 여부였다. 사건별 특성과 유사점 및 차이점을 MO(Modus Operandi, 범행이 이루어진 모습)와 증거를 중심으로 분석해보았다.

[서울 주택가 노인 피살 사건 4건에 대한 MO와 증거 분석 비교]

앞의 분석표에서 보듯이 4건의 중요한 특징은 모두 일치하거나 유사했다. 혜화동 사건의 경우 범행 방법과 뒷처리 과정 등에서 다른 사건들과 구별되는 모습들이 발견되지만 범인이 수사에 혼동을 주기 위해 의도적인 변화를 시도했을 수도 있고, 피치 못할 사정상 다소간의 변화가 초래된 것일 수도 있었다. 네 건 모두 동일범의 소행으로 봐야 할 이유가 충분했다.

면식범인가, 낯선 사람인가?
두 번째로 풀어야 할 숙제는 범인이 피해자들을 알고 있었는지 여부였다. 담을 넘어 침입한 흔적이 뚜렷한 삼성동을 제외하고는 특별히 침입하거나 강제로 진입한 흔적이 발견되지 않았다. 물론 여전히 전혀 면식이나 방문 사실이 없는 완전히 낯선 범죄자에 의한 범행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지만, 마치 집 안 구조를 잘 아는 사람인듯 실내를 자유자재로 오가며 범행한 점 역시 면식범일 가능성에 무게를 더했다. 또한 살인 방법이 지나치게 과격하고 폭력적이어서 분노나 원한의 감정이 표출된 흔적이 뚜렷했다.

하지만 네 가족 모두를 알고 있고 원한이나 분노의 감정을 가진다는 것이 가능할까? 군복무, 사업, 고향, 학교 등 피해자들의 공통점을 찾으려고 했지만 전혀 없었다. 그렇다면 혹시 한 가족과 면식 관계인데 이를 감추려고 전혀 상관없는 다른 피해자들을 살해했을까? 아니면 수도나 전기 등 각종 수리, 외판, 배달 등 업무차 방문해서 집 안 구조를 아는 자일까? 절도 전과자 등 빈집털이 전문가일까? 계약이나 채권 등 이해 관계가 얽혀있는 자가 전문 킬러에게 청부했을 가능성은? 각 경우의 타당성을 추리하기 위해서는 범행 목적에 대한 추리도 병행되어야 했다.


범행 목적은 무엇인가
복수나 원한 관계일까? 그렇다면 4건의 피해자 모두에게 원한을 살만 한 공통점이 있어야 했다. 피해자들의 연령대를 감안해서 일제 시대, 혹은 먼 조상대까지 거슬러 올라가서라도 공통점을 찾아야 할까? 수사진 내부에서는 조심스럽게 ‘노인 혐오’, ‘부유층 혐오’ 등이 범행 동기라는 의견이 제시되었다. 특별한 원한 관계가 아니라 그저 ‘돈 많은 노인’을 싫어하는 누군가가 부유층 주택가 중 아무 곳이나 골라 들어가 닥치는 대로 살인을 했다는 것이다. 만약 이 추리가 맞는다면 세상이 놀랄일이었다.

1990년대에 지존파가 부유층에 대한 혐오심을 드러내며 납치 살인을 한 적은  있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돈을 빼앗아 결국은 자기 욕심을 채우기 위한 범죄였음이 드러났다는 점을 감안하면, 집에 침입해 처형하듯 일가족을 몰살하고 현금이나 귀금속은 그대로 놔두고 유유히 범행 현장을 이탈한 이번 사건은 충격 그 자체였다.

금품을 노린 ‘실패한 절도, 혹은 강도’라는 의견도 제시되었다시되었다. 빈집인 줄 알고 침입했는데 사람이 있자 반항을 억누르고 신고를 못하도록 살인하고는 다급해서 돈을 못 챙기고 달아났다는 것이다. 하지만 한두 번이면 모를까 네 번에 걸쳐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바보가 검거될 만한 흔적을 전혀 안 남기고 연쇄 범죄를 저지를 수 있을까?

또 다른 추리는 유산이나 보험, 갈등 등을 둘러싼 가족 내 범죄 가능성이었다. 처음 두 사건까지만 해도 각각이 별도의 범죄고 가족 등 면식범에 의한 살인이라는 시각이 지배적이었다. 하지만 4건이 동일범에 의한 연쇄 범죄를 가능성이 뚜렷해진 지금은 신빙성이 매우 떨어지는 추리였다. 

그저 사람을 죽이고 싶다는 ‘살인 충동’이 동기고 ‘살인’ 자체가 목적이며 그 대상은 불특정다수인 ‘아무나’인데 가장 들키지 않고 살인하기 좋은 장소를 택한 것이 노인이나 주부 등 약자만 있는 ‘오전 시간 주택가’였다는 추리도 가능했다. 범죄심리학에서 이야기하는 ‘쾌락 살인’을 의미했다.

예전같으면 상상도 못할 일이지만 세상이 하도 험해지고 외국 영화에서 자주 등장하는 살인마들이 우리 사회에도 실제로 나타났다면 가능한 이야기였다. 하지만 외국의 연쇄살인처럼 ‘성(性, sex)’적인 측면은 보이지 않았다. 물론 비약을 하자면, 변태적인 가학적 성도착증이 있는 범인이 무자비한 폭력을 휘두르고 피를 보는 등 가학행위를 하면서 성적인 만족을 느끼고, 은신처로 돌아와서는 그 기억을 되살리며 자위 행위를 하거나 다른 상대와 성행위를 하는 모습도 추리할 수는 있다.



[가능한 범죄자-피해자 관계와 범행 목적 비교 분석]




4건의 피해자들간에 드러나지 않은 공통점이 있다면 원한 살인이나 청부 살인의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표에서 짙게 음영 처리된 항은 논리적 타당성, 과거 사례, 증거 등을 종합적으로 검토해보았을 때 ‘상당한 가능성’이 있는 경우이고 보다 엷은 음영 처리가 된 항은 ‘다른 조건이 충족될 경우 가능성을 인정할 수 있는’ 경우다. 나머지 가장 엷은 음영의 항은 ‘가능성이 희박한 경우’에 해당한다. 가장 가능성이 높은 경우에 우선 순위를 두되 가능성이 낮은 경우도 배제하지 않은 상태에서 수사 전략을 짜야 할 것이다. 이 중 특히 ‘가장 가능성이 높은’ 추리는 ‘강-절도 전과자가 사회에 대한 극도의 불만과 복수심으로 자신이 쉽게 침입할 수 있는 주택 거주 부유층을 마구잡이로 살해’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추리의 근거는 다음과 같다.

1. 범죄 수법, 시간, 대상, 흉기, 족적 등 4건 모두 동일범의 소행일 가능성이 높은데 피해자 모두와 원한 등 면식 관계일 가능성은 거의 없다. 즉, 범인은 낯선 사람이다.
2. 전혀 들키지 않고 침입, 도주했으며 담을 넘는 등 강-절도 전과자의 수법을 사용했다.
3. 강절도가 목적이라면 결코 금품을 그냥 놔두지 않을텐데 거액의 현금과 수표, 귀금속 등을 그대로 두고 갔다.
4. 머리와 안면부에 여러 차례 치명적인 공격을 가한 것으로 보아 ‘분노’가 매우 강한 사람이다.

다만 풀리지 않는 의문은 아무리 사회에 대한 불만이 극한점에 도달했다 하더라도 강-절도 전과자가 눈앞의 돈을 놔두고 그냥 갈 수 있겠느냐, 즉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지나갈 수 있느냐’는 부분이었다. 더욱이 범인은 들키지 않기 위해 혈흔을 씻고 방화하는 등 철저히 증거 인멸을 시도했다. 자포자기의 마지막 행동이 아니라는 뜻이고, 그렇다면 범죄자의 본능인 탐욕을 감춘다는 것은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 다른 가능성을 포기할 수 없는 이유였다.


공범이 있을까?
사람을 죽일 정도의 강력 범죄에 공범이 있으려면 거액의 돈이나 공통의 원한, 조직의 이익, 가족 같은 공동 운명체 등 합리적인 공통의 목적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이번 사건은 거액의 금품을 그대로 놔두는 등 돈을 노린 흔적이 없고, 공통의 원한이나 이익이 연루되기에는 피해자들의 공통점을 찾기 어렵다.

특히 공범으로 연쇄적인 범죄를 저지르려면 반드시 ‘자금’이 필요한데, 범인들 중 혹은 그 중 한명이 경제적 여유가 있는 경우가 아니라면 금품을 그대로 두고 살인만 계속 저지르면서 공범 관계가 지속될 가능성은 매우 낮다. 따라서 단독 범행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하지만 혹시라도 공범이 있거나 청부 살인일 경우를 배제할 수 없어 범행 현장 주변에서의 전화 통화 기록 등에 대한 수사를 실시해야 했다.


범인의 근거지는 어디일까
미국, 영국 등 외국의 프로파일링 교과서는 연쇄 살인의 경우 그 첫 사건의 피해자가 범인과 마주친 장소, 혹은 범인에게 납치된 장소에서 멀지 않은 곳에 범인이 거주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고 이야기한다. 그렇다면 이 사건의 범인은 첫 번째 범죄 현장으로 추리되는 신사동 근처에 살고 있을까? 그렇다고 보기에는 이동의 폭이 너무 넓었다. 강남북을 오가며 범행 대상을 선정했고, 길가나 골목 등에서 우연히 피해자를 만난 것이 아니라 탐색과 관찰을 거쳐 담을 넘어 침입한 수법 등으로 미루어 볼 때 굳이 적발이 쉬운 근거지 인근의 주택을 선택했을 가능성은 낮아 보였다. 지하철이나 버스 등 대중 교통 이용이 용이한 곳이라면 어디든 범인의 예상 근거지가 될 수 있었다.